↳김휘출 박사: 전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 부관장, 현 한양대학교미래인재교육원 문헌정보학 주임교수, 이노바저널 논설위원
한국은 서구 사회가 200년 넘게 겪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불과 몇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적응하고 시민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이러한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이념적 대립,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 권위주의적 유산, 지역 이기주의 등 다양한 모순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역할을 부여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국가를 이끌 비전보다는 정쟁에 매몰된 구태의 반복에 가깝다. 이는 조선말기의 시대상과도 매우 닮아 있다. 당시 일본의 유신 지식인들은 조선을 올바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이 진보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낡은 유교 윤리에만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조선을 서양이 침략한다면, 일본도 서양과 보조를 맞추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했다. 우리는 지금도 주변 강국들에게 이런 인상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한류 열풍 등으로 한국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듯 보이지만, 정치적 갈등과 사회 내부의 분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뒤처지고 있는 현실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철학자 헤겔이 말했듯이 갈등은 역사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며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들은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이성이 실현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이다. 헤겔이 역사를 이성의 힘으로 자유를 향해 진보하는 과정으로 본 것처럼, 오늘의 어려움 역시 민주주의 실현을 향한 여정의 일부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시민의 각성과 비판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시민사회에는 이런 힘이 충분히 뿌리내렸다고 보기 어렵다. 공정하지 못한 언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SNS 정보, 고착화된 편견 등은 시민정신의 성숙을 방해하고 있다.
다가오는 대선은 시민정신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TV 토론 등 제도적 공론장을 통해 사상 대립을 회피하지 말고 서로의 합리적 주장에서 배울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정치인들의 이념적 프레임에 휘둘리는 대신, 한국사회의 실질적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을 넘어, 안정성과 개혁의 가치를 결합한 정책 모델을 누가 제시하는지 찾아내야 하는 기회이다.
세계는 지금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급변하는 시대에 깨어 있는 시민의식이 없다면 한국은 또다시 100년 전의 과오를 반복할 수 있다. 미국 흑인 해방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이 “내가 더 많은 노예들에게 그들이 노예임을 깨닫게 해 주었더라면 수천 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 했듯이, 오늘의 한국에 필요한 시대정신은 바로 깨어 있는 시민정신이다. 유튜브나 SNS에 현혹되어 본질을 잃고, 싸구려 정치인의 선동에 휘둘리는 ‘눈뜬 장님’이 되지 말고 비판적 사고와 분별력을 갖춘 시민이 되는 노력이 절실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