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수선사 안에 세워져 있는 '최익현 선생 순국비(1986년 건립)
[이노바저널 /기획취재 최득진 주필 = 대마도 현지 발] 주필은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결정되던 그 시간(썬플라워호에서 소식을 들음-탄식과 박수가 동시에 들림), 대마도 히타카츠항구 도착하였다.
푸른 물결 넘실대는 일본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의 고요한 언덕 위 수선사(修善寺, 이즈하라 시내 소재). 그곳에는 조용히 서 있는 한 비석이 있다. 이곳은 1906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의 유학자이자 의병 지도자, 애국지사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순국비가 자리한 장소다.
선생이 생을 마감한 이곳은 단순한 ‘망국의 흔적’이 아닌, 지금 우리에게도 ‘국가 위기에서 지도자의 책임과 리더십’을 묻는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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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득진 주필(삼성 갤럭시 울트라 24)
최익현 선생은 조선 말기 외세 침탈의 중심에서 ‘국권 수호’를 외친 대표적 성리학 유학자이자 정치 지도자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직후 "오직 죽음만이 민족의 수치를 씻을 길"이라며 단식투쟁을 감행했고, 끝내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순국했다.
그의 국가관은 "백성은 나라를 떠나 살 수 없고, 나라는 정의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외세의 이권침탈과 내정간섭 속에서도 그는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개화정책과 부패한 정권을 꾸짖으며, 선비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최익현은 맹목적인 배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외세를 막무가내로 배격하기보다는, 조선의 자주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국제 질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균형 잡힌 세계관을 지녔다.
그는 개화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으나, "서양의 기술은 배우되, 정신은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시각은 단순한 국수주의를 넘어선 주체적 근대화에 대한 고민이었다.
최익현 선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국가가 외세에 휘둘리던 혼란의 시기, 그는 자신이 직접 검을 들고 의병을 조직했으며, 나아가 유배지에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를 보였다.
그의 리더십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도덕성: 권력이나 안위보다 신념과 윤리를 중시한 삶
희생정신: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결단
설득력 있는 글과 말: 상소문과 담화를 통한 민심과 왕심을 울리는 힘
오늘날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리더에게 요구되는 이 세 가지 요소는, 100여 년 전 대마도에서 최익현이 보여준 그대로다.
기자는 순국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비석에 새겨진 ‘不食之節(불식지절, 죽음을 선택해 굶주림으로 절개를 지킨다)’이라는 글귀는 오늘날 위기의 리더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다시 ‘복합 위기’의 시기에 서 있다. 기술 변화, 국제 정세, 가치의 혼란 속에서 국민은 다시금 ‘진정한 리더십’을 찾고 있다. 대마도의 조용한 비석은 말한다.
"지도자의 권위는 자리에 있지 않고, 진정성에 있다"고.
최익현 선생의 정신은 단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국가정신의 나침반이다.( 취재 / 이노바저널 역사기획팀, 2025. 4. 4-5.)
※ 본 기사(사진 포함)는 교육기관, 역사문화재단, 청소년 역사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 홍보에 활용 가능합니다.